230114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확실하게 구분해 후자를 제거하려 들기까지 하는, 하지만 그런 강경한 태도에 비해 정작 구분 기준 자체에 대한 고민은 거의 하지 않는 미즈키의 기묘한 윤리관이 좋다.
동족을 위해 가치를 만들어내고 공헌하는 '좋은 사람',
동족의 자원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나쁜 사람'.
마을을 벗어난 뒤 낯선 사람을 수없이 만나고 나서야,
개체 간에 이렇게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됐다.
- 미즈키 오퍼레이터 레코드 <제5종과의 접촉> 중
미즈키는 동족의 번영을 위해 움직이고자 하는 시본의 본능을 어느 정도 지녔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어디에도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족이 없는 혼종이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 섞여 살면서 제 나름대로 동족의 기준을 정한 게 좋은 사람/나쁜 사람인 거겠지. 좋은 사람은 동족이니까 지키고, 나쁜 사람은 동족을 해치니까 제거하는 식으로…. 하지만 애초부터 절대적이고 생물학적인 기준이 있어서 판단 자체를 할 필요가 없는 시본과 달리 미즈키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선을 임의로 그어둔 거나 다름없어서, 동족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실제로는 그 누구도 동족이 아님.
그래서 그 애에게 선악의 구분은 진정한 도덕이나 윤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필요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 넣어둔 대체품에 불과함. 즉, 언제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의미임. 지금은 미즈키가 선택한 기준이 인간의, 로도스 아일랜드의 윤리관과 유사하기에 함께할 뿐이지만, 언제든 그 기준이 다른 것으로(이를테면 시본의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절대 제로가 아님. 미즈키가 정식 오퍼레이터가 되지 못하고 켈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경계받는 것도 그 때문이고….
이런 점을 본인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타인에게 꺼려지는 걸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등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체념한 모습을 보이기도 함. 이 대사들도 그렇고 로도스 키친의 미즈키도 그렇고…. 남들이 자기를 꺼려할 거라는 생각을 익숙하게 함. 그렇다고 미즈키가 고독에 무감하진 않다는 점이 그 애의 비극이다 … .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을 뿐이지 그걸 달갑게 여기는 건 아니야….
그리고 여기서 박사가 등장함. 그 애를 지켜보겠다고, 그 애를 존중하고 곁에 두어 우리의 동료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천애고독했던 미즈키는 그렇게 박사의 손을 잡고 자신의 선악의 기준을, 더 나아가 동족으로 삼고 싶은 사람을 박사로 삼았음. 애초부터 미즈키에겐 정의감 같은 건 없었고 지금은 그 기준을 아예 박사의 것대로 따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박사와 닮고 싶어하는 미즈키…. 하지만 시본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가 동족을,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을 한 사람한테 맡긴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어. 눈마새의 용도 좀 생각나는데,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얼마나 두려운가.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한계가 없다는 게...
정의감? 아니, 박사는 오해하고 있어. 나는 딱히 악인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어. 하지만 다들 여러 사정이 있어서 악인 때문에 애먹고 있잖아? 그럴 때에 악인을 없애 주면…… 아무도 난처할 것 없고, 다들 한시름 덜 거 아냐?
박사의 이치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박사가 악인이라 판정한 녀석만 처리하면 되는 거잖아? 왜냐면 박사는 착한 사람이니까. 만일 박사가 사실은 악인이면 어쩔 거냐고? 그만해, 그런 건 곤란해. 왜냐면 만약 그러면, 나는 박사를……
가끔 드는 생각인데, 삼킨 음식과 흡수한 영양분이 우리를 만들어낸 거라면, 만일 같은 걸 먹고 같은 일을 하면, 점점 비슷해지는 건가 싶어. 박사, 우리도 가능할까?
- 미즈키 음성 기록 중
박사가 미즈키의 곁에 있겠다는 건 단순히 그 애를 동료로 삼는 것과는 다른 일임. 그 애의 정체성을, 존재 자체와 더 나아가 그 가능성이 낳을 결과까지 전부 책임져야 하는 일임. 켈시뿐만 아니라 미즈키 자신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 줘.' 라는 말을 하는 거겠지…
그리고 여기부터가 명일방주에서 정말 좋아하는 부분인데… 박사가 미즈키를 나쁘게 바꾸어 버릴 가능성 자체도 두려운 부분이지만, 이 게임은 더 나아가서 그런 변화를 의도하는 것 자체가 폭력적인 것이 아니냐고 물어옴. 설령 옳은 방향이라 해도 밖으로부터의 변화 자체가 이미 존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니까… 애초에 절대적인 옳음 자체가 존재할 수는 있을까? 테라에는 모든 일의 원흉인 절대악이 없고 뒤집어 말하면 절대선도 없음. 각자의 생존을 위해, 또는 바람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있을 뿐임.
켈시: 나는 네가 그를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자신을 재정립하게 할 거라 확신해.
켈시: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고, 어떠한 형태로 살아가는 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바꾸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켈시: 이런 방법이 자신이 인정하는 더 아름다운 삶의 형태를 추구하기 위해 그 대상을 바꿔버리는 사람과 과연 다를 게 있을까?
켈시: 클라우드샷 박사, 이건 질문이 아니야. 네가 '내 삶의 형태가 더 뛰어나'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알고 싶어.
- 미즈키 오퍼레이터 레코드 <제5종과의 접촉> 중
박사가 미즈키에게 하는 일은 미즈키에게 '할아버지'가 했던 일과 얼마나 다를까? 그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박사에게 미즈키를 맡겼을 거라고 생각함… 정답은 없는 질문이지만 간과해서도 안 되는 질문이지. 자기확신은 곧 독선이고 아집에 빠져 변질되기 너무 쉬우니까.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인간만이 자신이 아닌 타인의 말에 귀기울이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음. 명일방주에서 말하는 선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고 때로는 고통받으면서도 선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과정 자체라고 생각함. 그렇게 세상에서 나만이 옳지 않다는 걸 아는,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 보고자 하는 시각은 이 망한 세상에서 방주를 이끌 때도,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이끌어줄 때도 필요한 것이고… 그러니 박사는 미즈키의 닻이며, 동시에 미즈키는 박사의 거울이자 나침반이라고 생각함. 끊임없이 자기가 나아갈 방향을 돌아보게 해주는 내 소중한 아기 해파리…
손을 잡고 나아갈 길을 알려 달라고 하는 아기 해파리로 마무리합니다. 이 일러도 인간 아닌 것, 기묘한 것에 둘러싸인 채로 박사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거 정말 아름다움……